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미애/정계 활동 (문단 편집) == 초·재선 의원 == [[추미애]]는 [[광주고등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95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야당]] 총재이던 [[김대중]] 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다. 이후 판사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8월 27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당시 김대중 총재는 “제가 대구 며느리를 얻었다”면서 “세탁소집 둘째 딸이 부정부패한 정치판을 세탁하러 왔다”고 말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51358|#]] ‘대구’ 출신의 ‘현직’ ‘여성’ ‘판사’가 합류한다는 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엄청난 힘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현직 판검사 출신은 주로 여당을 택했고, 특히나 영남 출신은 소위 'DJ 당'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9504|#]] [[1995년]] 8월, 김대중 총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추미애는 “이왕 정치를 시작할 거면 [[지역구]] 선거에 도전하고 싶다”라는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당시 여성 신인들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구 대신 전국구(현 비례대표)를 선호하곤 했는데, 전국구 상위 순번이 확실시되던 추미애가 먼저 지역구 도전을 선언한 것이다.[* ~~반대로 지금은 비례대표보다는 지역구에 공천받는 것을 선호하며 비례대표 의원들도 임기 후반부터는 다음총선에서 지역구 공천받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개념이 아니다. 일단 주요 정당들은 '비례대표로 당선된 사람이 다음 선거에 다시 비례대표로 출마할 수 없다'는 룰을 갖고 있다. 그러니 비례대표 의원이 재선 의사가 있으면 당연히 지역구 공천을 노릴 수밖에 없다. 또한 비례대표 안정권 자리는 당연히 지역구 험지보다 선호된다. 공천받으면 당선이 확실한 곳이라면 지역구가 선호되고.] 김대중 총재는 물론이고 동료 선후배들이 일제히 ‘대단하다’며 칭찬했고, 그렇게 시작한 지역구 도전은 이후 추미애를‘여성 최초의 지역구 5선 의원’으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308&aid=0000021230|#]]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에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구]] 지역에 출마해 당선되어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로써 6공화국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서울 지역의 첫 여성 지역구 의원[* 엄밀히 소선거구제하에서 서울 지역 첫 여성 지역구 의원은 [[제2대 국회]] 때 종로구 갑에서 당선된 [[박순천]] 의원이 있다. [[박순천]]의원은 비례대표를 역임했지만 대한민국 최초 여성 5선 의원이자, 당대표라는 만만찮은 이력을 갖고 있다. 물론 이걸 추미애 의원이 그대로(더군다나 전부 지역구로) 이어 받았지만.]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1996년]] [[문민정부]] 시절, 초선 의원이던 추미애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한총련]] [[연세대 사태]] 진압과정에서의 여대생 인권 유린을 폭로하였다.[[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239464#cb|#]] 당시 사건은 최초엔 인권단체와 여성단체에 의해 1996년 9월 13일 기자회견 형태로 폭로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겨레신문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이후 국무총리와 내무부 장관 등에게 '공권력에 의한 여학생 성추행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관한 건의문'도 발송했지만 이 역시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단체 내에선 "이제 곧 10월이라 국정감사가 시작되니 이 문제를 서울경찰청 국정감사에서 다뤄줄 국회의원을 찾아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에 당시 다른 여성 의원들에게 먼저 제안이 갔으나 선뜻 나서는 의원이 없자 추미애가 맡았다. 그리하여 1996년 10월 9일, 서울경찰청 국정감사장에서 경찰이 여대생들에 가한 욕설, 성희롱 등의 폭언을 그대로 읽으며 폭로했다. 그러자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현 국민의힘 전신) 국회의원들은 위원장에게 추미애 의원의 질의를 당장 멈추게 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법으로 보장된 국회의원의 질의 시간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여당 의원들은 "더 이상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며 집단 퇴장을 했다. 그러면서 추미애에게 "국회의원으로서 품위 좀 지키라"라고 말했다. 이에 추미애는 "듣기 싫으시면 나가세요"라고 대꾸한 후 욕설을 끝까지 읽었다. 폭로한 욕설 내용은 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125362|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 [[1997년]] [[15대 대선|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당시 후보의 유세단장으로 일했으며, 정동영·천정배·신기남·정세균 등 15대 국회 초선 동기들과 함께 ‘DJ 특보단’을 꾸려 정권교체를 위한 전국 버스 투어에 나섰다. 대선 20여 일을 앞두고는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선거 운동을 하기로 하였는데, 당시엔 [[지역주의]]가 매우 극심했던 터라 [[대구시|대구]] 사람이 [[호남]] 사람인 김대중의 선거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고향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기도 했던 시기였다. 당시 대구에서 유세단을 만들려고 하자 김대중의 외곽 그룹이었던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 대구 지역 인사가 “큰일 납니더. 우리 당 간판 들고 유세하고 돌아댕기다가 돌 맞아 죽십니더!”라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http://news.joins.com/article/20513050|#]] 추미애는 “[[지역감정]]의 악령으로부터 대구를 구하는 [[잔 다르크]]가 되겠다”는 의미로 유세단 이름을 ‘잔 다르크 유세단’이라고 지으며 활동하였고. 이로 인해 ‘추 다르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98년]] 초선 의원이던 시절, [[새정치국민회의]]의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의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추미애는 정부기록보존소의 창고를 뒤져가며 군법회의 수형인 3,000여 명에 대한 기록을 최초로 발굴하였다. 추미애는 <제주 4.3 특별법(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을 대표 발의하였는데 공청회 당시 야유와 고함이 쏟아지고, 여러 반대 의견에 부딪혔으나[[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43913|#]], 1999년 12월 결국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고, 2000년 1월 공포되었다.[[http://www.globalnewsagency.kr/news/articleView.html?idxno=15892|#]] 추미애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제주도의회로부터 감사패와 명예제주도민증을 수여 받았다. [[2000년]]에 치러진 [[제16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구 을]]에 [[새천년민주당]] 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당시 득표율은 57.35%. [[2002년]] [[16대 대선|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펼쳐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 초기부터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경선 초기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낮은 상황이었다.[[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8008|#]] 그리고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 다른 당 후보에 비해 지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당내에서 후보 교체를 위한 후보단일화 압박이 있을 때(소위 [[후단협]] 사태)도 노무현을 지지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77&aid=0003815939|#]] 후단협은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며 주가가 상승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요구했다. 노 후보는 당시 최고위원이던 추 대표의 의원회관 방에 불쑥 찾아와 “추 최고, 나 좀 도와주소”라고 했다. 추 대표는 “민주당 당원인 이상 우리 당 후보를 도울 겁니다. 노무현이라서가 아니라 민주당 후보이기 때문입니다”고 답했다.[[http://news.joins.com/article/20513050|#]] 당시 추미애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뽑은 후보를 버리자는 것은 민주당을 우리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고, 국민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308&aid=0000021230|#]] 당시 상황에 대해 추미애는 "그때 내 반대 논리는 ‘지면 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당원과 국민이 뽑은 후보를 버릴 권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때 정말 회의에서 거칠게 싸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http://www.huffingtonpost.kr/2016/08/29/story_n_11757072.html|#]] 후보 교체론이라는 우여곡절까지 겪은 노무현은 결국 제16대 대선에서 민주당의 후보가 되었지만, 선대위가 출범하고도 당에서 선거자금을 한 푼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무현 당시 후보가 추미애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돼지 저금통을 들고 국민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데, 추 최고가 좀 도와주시겠어요?”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추미애는 노무현 후보 캠프의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아 희망돼지저금통 사업을 이끌며 50여억 원의 국민 성금을 모았다. 이때 돼지엄마라는 별명도 얻었다.[[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890|#]] 그 당시만 해도 노무현이 추미애를 정치적 동지로 여겼고, 항간에는 노 전 대통령이 그녀를 후계자 중 한 명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612|#]] [[http://news.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706207265i|#]] 가령 노무현은 [[16대 대선|16대 대통령 선거]] 운동 마지막 날인 12월 18일 저녁 서울 종로2가 유세장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는 후보 단일화를 이룬 당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대표와 함께 단상에 올랐는데,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일부 시민의 연호가 들리자 “속도 위반하지 말라”며 “대찬 여자 추미애 의원이 여기 있다. 제가 새로운 정치 안 하고 어물어물하면 멱살을 잡아 흔들 우리의 여성 지도자 추미애입니다. 또 국민경선을 끝까지 지켜주고 제 등을 받쳐준 정동영 최고위원도 어떻습니까?"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발언은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다만 지지철회의 공식적 이유로는 다른 것을 내세웠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308&aid=0000021230|#]]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423100003&ctcd=C03|#]] 그리고 [[2003년]] 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 추미애는 당선자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 때[* 새천년민주당 내에서 신주류와 구주류의 갈등이 폭발한 후, 신주류가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분당이 되었다.], 추미애는 개혁을 하더라도 민주당 안에서 해야지 당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분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에 남은데 반해,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내에서 개혁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추 의원으로서는 [[참여정부]]가 출범한지 단 몇 달만에 여당 의원에서 야당 의원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당시 추미애는 한 라디오 시사 프로와의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 온지 9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정치방식이라든지 국정운영에 대해 평가를 하신다면 몇점이나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추미애는 "제가 점수를 매길 입장은 아닙니다. 왜냐면 대선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구요. 지지 세력에게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제가 직접 발로 뛰고 돼지 저금통을 들고 다니면서 정말 코 묻은 돈, 눈물 흘린 돈을 모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서고금 역사에 전례가 없이, 지지해 준 정당을 탈당하고 지지 세력을 반 개혁 세력으로 몰아붙이고 분열시켰습니다. 더구나 측근 세력이 부패에 연루된 이런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재신임 국민투표로 또다시 지지자들과 국민들을 압박하는 또 헌법 질서를 파괴하는 이런 상황으로 빠뜨리는 것을 보면서, 제가 정말 오히려 죄송하다. 뭣 모르고, 본체를, 본질을 모르고 대선 운동에 앞장서서 지지를 호소했던 것이 참 염치없고 할말이 없다 이런 입장이지 제가 점수를 매길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라고 답하였다.[[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153480#cb|#]] 참고로 당시 분당 및 신당 창당을 이끌었고, 이후 [[참여정부]] 시절 정부와 여당에서 요직을 맡으며 잘 나갔던 [[김한길(정치인)|김한길]], [[정동영]], [[천정배]] 등은 훗날 ([[친노]] 중의 친노이자, 노사모 등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문재인]]에 반대하는 이른바 [[비문재인#s-3|반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2015년 말 ~ 2016년 초 당시 문재인이 당 대표로 있던 [[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 및 신당([[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가담한다. 반면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었던 추미애는 이때도 이들 분당파를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였고, 최고위원회의에서 연일 온갖 공격을 받던 문재인 당시 대표를 엄호하며[* 노무현 및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때 당시 추미애가 보여준 모습에 주목하였고, 결국 이들은 (지난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훗날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추미애를 적극 지지하는 강력한 지원군이 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2520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25204|#]], [[친문]]이 되는[[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37&aid=0000022033|#]] 역사의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참여정부에서 잘 나갔던 김한길, 정동영, 천정배 등은 친노에서 반문이 되고,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결별하였던 추미애는 반노에서 친문이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이처럼 추미애는 [[2003년]]과 [[2015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분당 사태에서 항상 분당에 반대하는 입장이고, 두 번의 분당사태에서 항상 분당파에 합류했던 [[김한길(정치인)|김한길]], [[정동영]], [[천정배]] 등과는 그때마다 다른 선택을 하였다. [[2004년]] 3월에는,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탄핵 사태|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추미애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3불가론’을 내세우며 탄핵에 반대하였다. [[http://weekly.donga.com/3/all/11/791354/1|#]] 당시 추미애의 3불가론은 ① 탄핵 대신 개혁으로 지지층의 동요를 막고 ② 탄핵 찬성은 [[한나라당]] 지지층이 주도하고 있으니 현혹되면 안 되며 ③ 그래도 탄핵을 강행하면 역풍을 맞아 총선에 참패할 것이란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추미애의 의견에 동조한 이는 단 1명[* 그 1명은 설훈 의원이다. 참고로 [[이낙연]] 당시 민주당 의원은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본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졌으나, 처음에는 탄핵에 찬성하였고, 탄핵소추발의안에도 이름을 올렸었다.]뿐 이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34&aid=0000086957|#]]. 민주당 지도부는 추미애에게 “당내 2인자가 당론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너 혼자 잘났느냐”는 비난도 쏟아졌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5&aid=0002639843|#]] 그래도 추미애가 말을 듣지 않자 민주당은 구치소에 수감된 의원 2명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서명까지 추가해 탄핵을 밀어붙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추미애는 "감옥 간 분들 표까지 긁어모아 탄핵을 한다면 말이 안 된다. 숯댕이(범죄 혐의로 수감된 의원)가 검댕이(노무현 대통령)를 나무랄 순 없다. 민주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차라리) 내가 기꺼이 표를 드리겠다." 며 결국 당론에 따르겠다고 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5&aid=0002639843|#]] 그리하여 탄핵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탄핵소추 발의에도 동참하지 않았던 추미애는 국회의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후 2004년 3월 12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그리고 나흘 뒤, 추미애는 당직자 회의에서 "탄핵 이후 국정불안을 우려해 탄핵 소추를 반대했을 뿐 탄핵 사유가 틀려서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탄핵 사유는 줄이고 줄여도 책자로 만들 정도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 탄핵 발의에 동참하지 않았던 내가 탄핵 찬성론자들을 말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4/03/003000000200403161719074.html|#]] 또한 "노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보고 재신임을 스스로 평가하겠다며 대국민 협박을 한 것을 보고 탄핵하지 말자고 할 수가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닌 정치꾼" 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http://m.mk.co.kr/news/headline/2016/526893|#]] 애초 탄핵에 반대했던 추미애가 탄핵안 가결 직후 이러한 강경 발언을 한 것은 당시 17대 총선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민주당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들끓는 탄핵 반대 여론 속에서 흔들리는 민주당 지지세력의 결집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반면 당시 노 대통령 및 열린우리당 지지자들로부터는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결국 이때의 강경 발언들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아직도 추미애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인터넷 논객 [[드루킹]]과 그의 추종자들] 또한 노무현 탄핵 건은 훗날 추미애가 출마한 2016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경선에서 경쟁자들 및 경쟁자 지지자들이 그녀를 공격하는 주 레파토리가 된다.[[http://news.joins.com/article/20513050|#]] 한편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추미애가 당초 탄핵에 반대하며 주장한 '3불가론'에서 예측했던 대로 탄핵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것도 [[17대 총선]]을 앞둔 상태에서.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곧이어 실시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은 선거운동기간 동안 당의 얼굴을 담당하게 되는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추미애에게 맡겼다. 선대위원장직을 수락한 추미애는 선거운동과정에서 탄핵 반대 여론의 거센 역풍을 직시하고, 민주당이 탄핵에 동참한 것에 대해 사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만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골수 지지자들 중에서는 사과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탄핵의 정당성을 유권자들에게 설명해야 한다며 추미애의 결정에 대해 못 마땅해하는 자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추미애는 사과의 의미에서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5·18 망월동 묘역까지 15㎞에 달하는 3보 1배를 하였다. 당시 무릎이 상해 지금까지 높은 구두를 신지 못한다고 한다.[[http://news.joins.com/article/20513050|#]] 3보 1배를 마친 후 2004년 4월 10일 모란시장 유세에서 추미애 선대위원장은 "이제 그만 민주당을 용서해달라"며 "열린우리당은 재벌공조당이지만, 민주당은 가다가 실수는 했을지언정 문을 닫아서는 안될 정당이다"고 했다. 또한 "열린우리당 후보들 면면을 보면 찍을 인물이 없다. 탄핵역풍에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될 것 같으니 별의별 사람들이 몰렸다.", "사과 한마디를 그렇게 요구했는데도 노 대통령이 응하지 않아 지금과 같은 파국을 초래했다. 노 대통령에게도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고 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44726|#]] 또한 광주유세에서 민주세력을 둘로 나눈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을 표로 심판해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하기도 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33379|#]] 결국 탄핵 반대 여론의 역풍으로 민주당은 17대 총선에서 단 9석의 의석을 얻는데 그쳤다. 그로 인해 민주당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추미애 본인도 낙선하였다.[* 참고로 당시 추미애는 3보 1배를 하며 돌아다닌 까닭에 본인 지역구에서의 유세는 거의 하지 못하였다.] 정계 입문 이후 1999년 [[홍콩]]에서 발간되는 시사주간지 에서 ‘아시아 정치 지도자 20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2000년에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여성, 21세기를 빛낼 여성’에 선정되었다. 또한 한국유권자연맹으로부터 ‘국회의정활동 최우수상’과 최근에는 전국 NGO 단체연대로부터 '올해의 닮고 싶은 인물상’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시사저널>이 시민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차세대 지도자감 1위’로 뽑혔고, 2004년에는 ‘국민이 뽑은 정당의 최고 정치지도자 1위’(<월간중앙>-ANR 공동 여론조사)에 선정되기도 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72836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